절이 있기전에 수행이 있었다 - 2009년 4월16일 법문중에서

맑고향기롭게

2017-06-09

절이 생기기 전에 먼저 수행이 있었습니다. 절이 생기고 나서 수행이 따라온 것이 아닙니다. 절이 생기기 이전에 수행이 있었어요. 그러니 절이나 교회를 습관으로 다니지 마십시오. 절에 다닌 지 10년, 20년 됐다는 신도들을 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버릇처럼 절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분들은 절 재정에 보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신앙 알맹이는 소홀해요. 절이나 교회를 습관으로 다니면 안 됩니다. 극단주의자들은 ‘종교는 마약이다.’이런 소리를 하지 않습니까?
깨어있어야 해요. 내가 왜 오늘 절에 가는가? 왜 교회에 가는가? 그때그때 스스로에게 물어서 어떤 의지를 가지고 가야합니다. 그래야 자기 삶이 바뀝니다. 삶은 바뀌지 않고 행사에만 참여한다고 해서 그 절이나, 교회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무엇 때문에 절에 나가는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지 그때그때 냉엄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성에 젖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어리석은 짓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길상사가 생긴 지 십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여러 불자들 신심과 정성으로 현재와 같은 절이 됐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도량은 눈에 보이는 건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건물은 다 한때 있다 없어지는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습니다만, 절이 있기 전에 먼저 수행이 있었습니다. 건물이 있기 전에 수행이 있었습니다. 도량은 눈에 보이는 건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도량에 사는 사람과 도량을 의지해서 드나드는 여러분 삶이 맑고 향기롭게 바뀌어야만 비로소 도량다운 도량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스님들은 한때 머물다가 떠나가는 나그네들이에요. 출가한 스님들은 원래 자기 집이 없습니다. 물론 자기 절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절은 개인 소유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가불자들은 자신뿐 아니라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면서 그 도량을 가꾸면서 보살핍니다. 표현을 달리하면 신앙심이 지극한 여러 불자들이 곧 그 도량 수호신입니다. 이런 도리를 분명하게 알아두십시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길상사도 이젠 안팎으로 바뀔 때가 되었습니다. 이 도량에 인연 맺은 여러분 삶이 저마다 맑고 향기롭게 바뀌어야만 이름 그대로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깊이 마음에 새기기 바랍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재가불자들이 승가에 귀의한 것은 그 청정성 때문입니다. 청정성이 승가 생명력입니다. 스님들과 친분이 있다고 해서 세속인정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흔히 ‘나만 믿고 살라’며 신도들에게 무책임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나만 믿고 살라는 거예요. 중, 믿을 거 못돼요. 부모나 형제, 저희 집도 버리고 떠나온 놈들을 어떻게 믿어요? 언제 변할지 모르는데, 믿을 게 따로 있지 그런 소리에 속지 말라니까요. 그건 불교가 아니에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에 의지해 살아야 합니까?”하는 물음에 부처님께서는 ‘나만 믿고 살 거라.’ 이런 소리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 자귀의법귀의”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법을 등불 삼으라.” 법이라는 것은 진리에요.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을 등불삼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 “자귀의법귀의, 자등명법등명” 이게 근본입니다. 그 밖은 다 허상이에요. 여기에 불교 참 면목이 있습니다.

 

  - 2009년 4월16일 법정스님 마지막 봄 정기 법문 중에서